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한겨레〉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오늘의 역사를 기사의 문법으로 다시 쓰는 ‘1919 한겨레’ 기획을 진행중이다. 특히 22일은 망국의 왕이었던 고종의 서거가 공식 발표된 지 100년을 맞는 날이기도 하다. 고종은 1919년 1월21일 뇌일혈로 숨졌지만 조선총독부는 사망 시점을 하루 늦춰 발표해 ‘고종독살설’ 등 억측을 초래했다. 그의 죽음은 때마침 독립선언의 ‘거사’를 모의하던 나라 안팎 독립운동가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다. 〈한겨레〉는 일제강점기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대표적인 역사학자 3명을 초대해 3·1운동의 의미와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비운의 왕 고종에 대한 평가 등을 물었다. 좌담은 21일 낮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기획: 오승훈 엄지원, 출연:김정인 박찬승 임경석, 연출:조소영
한겨레에서 3.1운동 100년을 앞두고 관련 연구자들을 모아 대담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한국 근대사 전체를 장기적으로 보면 서세동점(서양이 동양을 지배함)
의 조건 아래서 서구 주도의 세계 재편 과정에서 실패한 역사였다.
그 이전에 전통적올 존재하던 집단적 자아가 해체되고 범 서구 중심의 지구구성원 90%가 겪었던
근대체계에 식민지적으로 노예적으로 재편되는 역사경로를 밝으면서
한국은 지동상에서 소멸됐고 죽었다.
그 기가 막힌 일이 생겼다. 조선 한국이라는 의식이 해체되고 더이상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생존할수 없는 조건에서 내가 죽지 않았다, 조선인으로 살겠다고 세계에 선초한 것이다. 3.1운동은 16세기 이후 서구 주도의 세계체제
전계과정애에서 노예적으로 포섭됐던 인류 구성원 90% 겪었다.
죽어간 자아를 되살린 인류 보편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역사 노정이고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거대한 역사다. 16세기 이래 서구 주도 체제에 반성적 성찰적 계기를 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5.4운동을 주도한( 베이징대 학생 ) 푸쓰넨은 3,1운동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혁명이었다. 그래서 정의의 결정체다.'
라고 평가했다.1919년을 현대사의 출발점이라고 보는데 3.1운동 당시 민주주의 논리로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점이 인상적이다.
전세계 유래가 없다.
전 국민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어느날 수백만명이 자신의 희생을 무릎쓰고 공동체의 일에 생명의 위협에도 거리로 뛰쳐 나왔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한국사회의 심리상태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때문에 뭔가 될것 같다. 세계1차대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하나의 틈이 보인다.
평양시민 30%가 독립이 될것 같다.
50% 반신반의 20% 안 될것 같다.
학생들은 3.1일 시위를 할떼 탑골공원에서 나와서 종각에서 사람을 모아 대한문 앞으로 간다.
대한문 앞을 지킨 이 왕직의 경비들을 밀치고 들어가서 자기를 참배를 하겠다고 하는데 거기서 왕세자 이은을 만나겠다 했으나
이은이 거절해서 돌아 나와 시위를 이어간다.당시 세브란스의전의 어떤 학생이 쓴 것을 보면 덕수궁에 들어가 보니 너무 호화로워서 실망햇다고 한다.
시민들의 삶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특별히 고종에 대한 동정심을 느껴지지 않는다.
황실은 식민지화에 가장 앞장서서 협력했다. '반민족행위자다' 대한민국 황실이 일본 천황의 하위 위계를 갖는 이왕가 집단으로 전환됐고
그 과정에서 이왕가로서의 합당한 예우를 일본제국에 의해 보장받았다. 그래서 왕족으로 가졌던 특권과 재산 사회적 지위 명성을 식민지하에서도
향유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순종은 저항하지 않았다.
황실이 중심이 되어 정부재정으로 들어갈 세원을 황실재정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정부재정은 빈약했고 황실재정은 늘어났다. 고종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하려다 보니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다.고도 할수 있지만 정부재정은 어째던 허약해진다.
또 고종은 주요대신들은 몇달만에 계속 바꾼다. 그래서 업무 파악도 못한 상태에서 쫒겨나고 다른 자리로 가게 돼 정부가 취약해진다.
굉장히 문제다.
고종은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정부는 허약하게 만든 상황에서 을사조약이 들어온 것이다.
자시이 모든 권력을 쥐었다가 그걸 자기가 먹고 책임져야 하는데 무책임하게 대응했다. 국왕이 혼자 힘으로 월하겠나. 관료와 군대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을 다 적으로 돌리고 혼자 뭘 하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