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녹색연합/책산책

우리의 읽어 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박넝쿨 2016. 5. 14. 17:42

『우리의 잃어버린천재화가 변월룡』-글 문영대

 -한국인 화가중 변월룡은최초의 박사학위의 소유자기록

한국인 미술학 박사1호

러시아 레핀미술대학교수였던 서양화의 거장

평생 조국을 그리워했던 위대한 민족화가

-1950년부터 미술대학교수로 역임했으며 한국인 화가중 그가 최초로 국외 정교수역임

 

한,중,일 -서양화 도입에관하여.

한국에 서양화가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로 고희동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도입하였다.

20세기 초 엽인 당기 일본에는 이미 현대미술, 즉 후기인상파나 야수파,표현주의 등이 받아들여져 한창유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으로 유학간 한국학생들의 자연히 그런 유파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그러다 보니 한국화는 뿌리 깊은 정통 서양화는 제대호 접해 보지도 못한 채 바로 현대미술부터 받아들인 형국이 되었다. 여기서 정통 서양 정통 서양화란 르네상스시대부터 인상파까지 근 4세기이상 걸쳐 진행된 넓은 의미의 구상미술을 뜻한다.

 

한국 구상미술의 현주소

당시 일본에서는 정책적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었지 때문에 입학하기가 어렵지않았다고 , 이종우는 유학사정을 회고 하고 있다.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이종우, 장발, 이병규, 공진영, 도상봉, 등이 이케이스에 속한다-<한국의 현대미술사, 오광수열화당>

이 글에서 알수 있듯이 당시에는 가정형편이 허락되면 미술재능과 무관학 일본의 미술대학에 별도의 시험 절차없이 '무혈입성' 할수 있었다. 일본유학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다녀올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학창시절에 치열하게 그림에 매달린 유학생은 적었고 또 쉽게 화가의 길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에서 배운 어정쩡한 서양화는 1961년 정부에서 민족기록화를 주문 제작시켰을때 그 치부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때 그려낸 기록화들이 한결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졸작들이었다. 한국의 서양화가들이 그런 역사적 주제를 다루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변월룡은 제자들로서 교수들에게 '옛 위인들을 그려 내는것은 화가들의 몫'이라며 화가가 그들을 그리기 전에 문헌이나 각종 자료 조사등을 통한 충분히 숙지하도록 했다. 그러한 상태라야 그들의 상이 어느정도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의복이나 장신구 등은 연구를 통해 철저히 고증한 후 그리도록 했다.

 

 

 ●역사적 관점의 작품과 예술은 현실반영을 뜻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선배화가들은 이 부분에 관해서는 너무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니 현실참여에 너무 인색했다.

사실그들의 작품만을 놓고 보면 언제 우리나라가 치욕을 겪은 적이 있었는가 싶은 정도다.

민족과 역사의 큰 흐름에 함께 취하지 않는 점이 못내 아쉽다.

 

● 36년이라는 긴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도 일제에 항거한 그림은 좀처럼 찾아 볼수가 없고 해방과 함께 찾아온 문단의 수난사에서 광복읠 기쁨이나 동족상잔의 아픔이나 슬픔등은 제대로 표현한 화가들이 드물었으미 그점은 분명 한국미술사의 결점으로 꼽힐것이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조국스페인의 잔혼한 참상에 항거한 저모가 한국전쟁을 주제로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려 낸점등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작다할수 없다.

영국의 케케드클라로의 말도 참고할남만 하다.

<명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그는 <명화란 격이 좀 떨어진다 해도 그 시대의 언어을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지으면서 만일 한 예술가가 감동할만한 회화적인 요소가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만큼 그는 운이 좋은 화가이며 그 화가에게는 그만큼 명화를 남길 확률리 높다.> 라고 했다.

우리는 명화를 남길 확률이 많았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채 잃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