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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문화 해설

박넝쿨 2017. 5. 16. 12:29


역사를 알게 되면 사람을 알게 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근본을 중시할 줄 아는  인성을 갖출 수 있게 되면,

 그 바탕 위에 비로소 현대를 살아가는 지시기안 정보도 유용해지기 마련이다


미추홀: 물이 고장, 근본, 바탕이 되는 지역.

 

부평? 경지개간의 결과로 얻은 풍요로운 평야 지역임을 뜻함,

부유한 벌판, 넓은 벌판

 

계양지명의 연혁

주부토(475)장제군(경덕왕 757, 183년간 유지)수주(태조, 940, 210)안남도호부(고려의종, 1150 65)

계양도호부(의종, 1215, 93)길주목(충렬왕 1308,2) 부평부(충선왕1310) 부평도호부(태조

 

1.부평현재 부평구, 계양구 서구지역을 포괄함.

계양구 문화 유적지- 계양산성, 부평도호부관아, 부평향교, 황어장터(3.1운동 300명이 모임 인천에서 가장 많이 모임)

 이찰,이율형제정려(효행을 기림), 이선봉묘, 영신군묘, 자오당(관사) 초정터, 마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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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정학적 위치로 한강과 서해바다와 연접한 요충지역

서해관문으로 교통과 군사상의 요지(계양산성, 중심성, 금륜역(일종의 정거장과 숙박시설이 함께 운영되던 곳으로 역마를 갖추고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지방관청에 전달하거나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도왔다) 다남동은 고려때부터 금륜역이 이곳에 있어 역굴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역은 고려시대에서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다)

한양으로 통하는 전방의적인 역할 당담

 

백제초기에는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이 징맹이 고개를 넘어 서울지역으로 운반되었던 소금의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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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양산 해발 395m 3000년 전 신석기시대 지형은 계양산 밑은 대부분 물

-서쪽-서구 바다

-북쪽-한강

-동북쪽은 저습지 -고려중기까지 개간되지 않음

고구려 장수왕(475)3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합니다.

먼저 승려인 도림을 첩자로 보냄.

큰죄를 짓고 온 것처럼 바둑으로 개로왕과 친하게 됨 개로왕은 바둑을 즐겼고 도림은 바둑의 국수 대왕의 나라는 모두 산과 강과 바다로 둘려 쌓여 있어 하늘이 내려준 요새이지 사람이 만들어 낸 모양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이웃에 있는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성곽과 궁궐을 수리하고 있지 않아 선왕의 해골은 땅에 드러나고 백성의 집은 물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신은 대왕께서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지으라고 부추김 . 곳간이 텅텅 빔.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짐

고구려 7일만에 위례성을 휩쓸고 이어 아리수를 건너 도읍 한산까지 함락 시켜 버림

개로왕이 있는 힘을 다 해 싸우지만 고구려 군사들은 잡혀 아차성 아래서 베어 죽이고 남녀 포로 8천명을 잡아 돌아감

 

4.고구려시대(장수왕 475)-주부토 (해수와 밀물이 혼합되어 드나드는곳. 황무지였는데 점차 로 방죽을 막아 농경지로 개답한곳)- 줄보뚝)

장수왕 남하-백제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당하자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고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 고구려 땅이 됨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한이후 대대적인 지방제도개혁을 단행하고 이때 부평은 주부토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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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경덕왕(757)- 장제군(길다란 제방)

경덕왕의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면서 전제 왕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으로 이해할수 있다. 이의 일환으로 3자 또는 4자였던 우리의 고유지명을 중국식으로 2자로 개명한결과가 장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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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조23(940)-수주(210년만에 없어짐) -수주악

수소나무 우거진 밀림 속의 마을이란 이름

수주 전국50주 의 하나로 지금의 계양구 부평구, 김포시일대 인천일대, 시흥시, 안산시, 고양시, 파주시 12개 현을 거느린 대규모 행정구역

개칭한 것은 승격의 의미

 

부평이씨 시조인 이희목은 후삼국 시대 지방호족으로서 자신이 관할하던 수소마을(현 목상동지역)을 왕건에게 바쳐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삼한벽상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관계가 심중 대광에 이러렀으며 수고마을은 태조 23년에 수주로 불리게 되었다. 후대 그의 본거지인 수고마을의 이름을 따서 수주로 높여주고 종전대로 장제 지방읠 통치를 맡겼던 것으로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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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도호부>- 안남산

의종4(1150)

안남? 고려시대 수도 개경의 남쪽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전주고부남주(영암)전주수주(마지막도호부)개경의 방비를 위한 요충지로 중시

안남 도호부의 행정중심지는 수주의 읍치였던 선곶에 그대로 있다가 의종 19(1165)에 계양산 남서쪽 산록이 중구봉 아래 (계산동 769번지부근으로 추정 일명 온수동)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부토, 장제군 수주등 그 이전까지는 계양 지역의 행정중심지는 계양산 북쪽 산록의 한강 연안에 입지하였지만 이때부터 비로서 계양산 남쪽 산록일대가 계양지역의 새로운 행정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동서남북을 안위한다는 의미로 ()자를 표기하여4(안동, 안서, 안남, 안북) 안남산(65년만에 없어짐)

 

<계양도호부> - 계양산 역사상 처음으로 계양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출현했다. 치소는 중구봉 아래로 그대로 유지 되었다. 당시의 치소부근에 이규보가 계양도호부사를 지내면서 지었던 자오당터(계산동 769번지)가 남아 있다.

고종2(1215) -93년간 사용

 

충렬왕34(1308) 길주? 왕이 친히 다녀간 길한 고을이라는 뜻

(길주목). 꿩과 산비둘기가 지천임 매방설치)원 황실의 매를 공물로 요청하자 공물용 매사육 및 매 사냥을 담당케 하기 위한 웅방이라는 기구 설치되었던 데에서 유래. (길한 고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음) 충렬왕이 매사냥을 좋아함 5번이나 부평에서 사냥을 함(그의 유언이 자신이 죽으면 길주에 장사 지내달라고 함)

 

고려 충렬왕은 태자시절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공주와 결혼했으면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애 왕위를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를 제국대장공주라고 불렀다. 원나라와 왕실 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이 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양구의 우호관계를 튼튼히 할수 있었고 지금까지 권신들의 세력에 억눌러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 할수 있었다. 그러나 자수정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관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을서 고려왕실에서는 몽골 풍속, 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고려때는 매사냥이 유행이었다. 특히 충렬왕은 몽고에서 매사냥을 즐겨한 터라 그것이 하고 싶어 못 견디었다. 국영 매방이 서울인 개경에 있었다. 그런데 사육하는 매가 민가의 닭이나 오리를 공격하여 피해가 커서 백성들이 원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충렬왕은 옹방책임자였던 이탁에세 매사냥을 할수 있는 새로운 매방 자리를 찾도록 명령했다. 이탁은 부하 박향 윤수 함께 장소를 물색하던 중 부평 계양산의 큰 고개까지 와서 꿩과 산비들기가 지천이고 산 아래로는 서해도 보이는 곳을 낙점하고 왕에게 아뢰었느니데 충렬왕이 보고를 받고 몹시 기뻐했다. 이에 충렬왕은 당장 그곳에 매방을 만들 것을 명해 몇 달 후 계양산에 국영 매방을 생긴이래 다섯차례게 걸쳐 이곳을 다녀 갔다고 한다.

어느 해 가을 왕은 왕비인 제국공주를 동반하였는데 왕비는 사냥을 싫어했다.

 

충선왕2(1310) 목이 폐지됨에 길주목은 부평부로 개칭 (6개의 현을 거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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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도호부>-부평? 부유한 벌판, 넓은 벌판

태종13(1413) 부평도호부로 개칭부평현부평군부천군(일제1914)

부평(농지가 넓어 수확이 많이 나는 들이라는 뜻)

부평치소는 처음에는 온수동에 그대로 있다가 1400년 중반이후 계양산 남쪽 사면의 심일촌 현재의 임학동부근의 큰골로 추정 수주김씨 일명삼일김씨)으로 이전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세종때에 부평일대에서 온천탐색작업이 집중적으로 행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개의 우물을 팠으며 그 결과 지기가 쇠진함을 따른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치소는 다시 현재의 부평초등학교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평도호부는 온천파동으로 8년간

-환관 김순손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1년간

-장릉 방화죄인인 최필성의 태생지라는 이유로 10년간

모두 3차례에 걸쳐 현으로 강등되는 수난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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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1.해발 395m 계양산성 서북쪽(230m),동남쪽 120m 3부와 5부 능선에 입지하고 있음.

2. 전체 성곽의 80%이상 유실됨 잔존하고 있는최대 높이는 7m

3,97년 계양산성 문화재 지표조사 -8차까지진행됨. 1,000여기 문묘이장

계양산은 서해의 관문으로 교통과 군사상의 요지로 여겼으며 한양으로 통하는 전방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제 초기부터 생산된 소금이 징맹이 고개를 넘어 서울 지역으로 운반되었던 소금통로였다.

 

계양의 역사와 도시변화

p42 자연지리적 환경

1) 지형의 수계

(1) 산줄기와 물줄기

계양구는 북쪽의 계양동 일대를 제외하면 부평분지 안에 자리한다. 부평분지는 그 규모가 커서 계양구 외에도 부평구 및 경기도 부천시를 그 안에 품고 있다. 부평분지는 굴포천이 한강을 향해 빠져나가는 북동쪽 일부만을 제외하면 산줄기에 의해 주변이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분지를 이룬다. 계양구 지역이 속해 있는 부평분지는 북쪽이 계양산으로부터 서쪽의 철마산을 거쳐 남쪽의 성주산 소래산 동쪽의 원미산등에 이르는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다. 이 산줄기를 이루는 기반암은 주로 결정편암이나 화강암류이다. 이들 암석은 지하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냉각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풍화에 비교적 강하고 그래서 부평분지를 에워싸는 산줄기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산줄기의 주요봉오리들은 경사가 급한 곳이 많고 기반암이 드러나 있는곳도 적지 않다. 산줄기는 역사적으로 부평과 인천을 구분하는 자연적 경계이자 장벽으로 기능해 왔다.

 

이 산줄기 내부는 저평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계양구 부평구 부천시등 시가지 발달에 유리하였다. 부평분지내부에 발달한 수계는 모두 굴포천으로 흘러들어간 다음 북쪽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하는 형태를 보인다. 굴포전 주변의 저습지와 충적지는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적 수리시설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본격 개간된 곳으로 부평분지 내에서도 거주화가 비교적 늦게 진행된 구역이다.

 

한편 부평분지를 둘러싼 산줄기를 우리 조상의 전통적인 산지 인식체계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산줄기를 일종의 분수계의 의미로 여겨왔다.

 

주요고개는 계양구로부터 서구로 넘어가는 징맹이고개

계산동과 목상동을 오가는 하느재 고개

계양구와 서구를 향해 경인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안하지 고개가 있다

징맹이 고개는 일명 수주고개라고도 하는데 고려 말기 충렬왕이 이곳에 국영매방을 설치했었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한다,

하느재고개는 계양산의 주봉과 계양산성 사이의 고개로 과거 계산동과 목상동을 연결하는 고개였다. 이명 소반재 고개라고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수주김씨와 수주이씨가 이고개를 경계로 각각남쪽과 북쪽 지역의 유력한 사회집단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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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구 유적지-계양산성, 부평향교, 부평도호부관아

주산(치소의 입지 선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 주산인데 명당을 명당으로 만들어 주는 산

진산: 고을마다 산 신령이 머무는 곳(토찬 신앙)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고구려에 왕들 무덤에서 나타나는 그림인데

여기도 마찬가지로 북쪽을 주산으로 남쪽의 기슭이나 저평지에서 치소를 입지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러한 풍수지리적 치소의 입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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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도호부>- 지금으로 비유하면 각도에 속한 시 정도 규모의 행정기구 관청 (건축물)

조선시대에는 행정업무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일종의 충성서약의식이라 할수 있는 향망궐배가 진행되는 의례공간가 진행되는 의례공간이자 상급기관 관리나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숙식장소인 객사

고을 수령의 생활공간인내아

기생들의 처소인교방

 

관아의 배치

-객사: 고을의 가장중심

왕권을 상징하는 건축물 초하루와 보름에 충성서약식. 망궐배 진행

고을수령 및 모든 벼슬아치들이 객사의 중앙건물인 정청에서 전패와 궐패에 예를 표했다. 군주는 남면을 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가 남면할수 있도록 객사의 청정역시 정남향으로 건축된다.

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 기능

 

-동헌: 고을 수령의 직무실 객사 옆- 지방에 파견된 목민관이 집무를 보던 곳

-향교: 동쪽에 자리 잡음 경복궁과 비슷한 위치 조선시대 일반적인 배치

 

<부평향교>

 

대성전 중심의 제향공간

명륜당중심의 강학으로 구별전학후묘의 건물배치

1941년 인천부윤 나이 가이는 같은 부내에 향교가 2개 줄 필요가 없다고 강세졸 인천향교(부천향교)에 봉안된 유패를 소각하고 문서와 각 비품을 부평향교로 이관하였다 해방후 부평향교와 인천향교가 분리 뵈었다.

 

-사직단: 서쪽에 자리 잡음

-서낭단: 남쪽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여단: 떠돌아 다니는 혼령인 여귀를 위로하기 위한

이러한 읍치의 모습은 조선말까지 구성요소의 변동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조산>

부평지역의 5개의 조산이 있었다고 주장

초기에는 계산동 23번지와 60번지의 위치에 두 개의 조산이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부족하다고 인식하여 계산동 41, 63, 64번지의 위치에 조산을 추가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한면 조산의 둘레는 직경 20~30m 높이는 8~10m였으면 일제 강점기의 경지 개간과정에서 대부분 저습지 매립용 토사로 사용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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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1168~1241

고려시대 계양부사 로 부임을 해서 13개월 근무를 하게 되는데 많은 문헌 자료를 남김. 이규보는 계양산의 3면이 모두 물이었다고 언급

서쪽-서구의 바다, 북쪽- 한강 동북쪽을 저습지

이규보: 고려시대 시인이자 철학자 어릴때부터 신동소리 듣고 자람. 당대의 명문장가 아들이간행한 동국이상국집 부사로 부임하면서 자오당기를 비롯한 여러 문집을 남김

이규보는 자신의 잘못으로 계양에 온 것이 아니었다. 외방의 수령들이 팔관하표를 올리지 않아 그것을 문제 삼으려다 윗사람이 제지하여 그를 따랐다지만 자신만 탄핵을 받아 계양에 온 것이었다. 자신만 처벌받아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13개월동안 계양부사로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생활을 좌천이 아니라 귀양으로 받아들였기에 자신을 수인으로 표현 했다.

김포 부평 부천-고려중기까지 개간되지 않았다고 함

 

 

슬프다 계양을 지키는 사람

월급이 적어 술 빚기 어렵네

 

이미 쫓겨난 신하 되었으니

기갈됨이 진실로 마땅하구나

어찌하여 부질없이 한하면서

이 짧은 눈썹을 찡그리는가

입 별려 억지로 큰 웃음치니

웃음이 식어서 도리어 슬프네

이 말을 경솔히 누설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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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의 화성능행과 부평도호부>

-조선 22대 국왕인 정조임금은 재위기간중 가장 많은 능행을 국왕.

-조선시대의 능행목적은 선왕에 대한 추모 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를 통하여 왕권 강화를이루려는 정치저거인 목적이 강하였으나 정조는 이에 더하여 궐 밖을 나오는 국왕의 공식행사를 이용하여 민의 상달 정책의 확대와 수도권 거점 도시를 육성하고자 하는 부가적인 성격도 보인다.

-1797년 정조가 가을정기 능행은 김포 장릉을 참배하고 수원의 사도세자 묘소인 현륭원에 참배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능행길에서 거친 고을이 무려 10개읍으로 파악됨

-1797년 김포 장릉 능행길에서 정조는 부평도호부에 들러 주정하였는데 이때 인근 고을의 부민들을 친견하고 고충을 물러 이를 해결해 주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함.

-부평보호부 인근고을 백성들의 고충은 주로 세금과 관련한 것이어서 정조는 백성들을 친견한 이후 즉시 부평부의 환곡을 탐감하는 조치를내림. 부평도호부를 지날 때 부평지역의 세력가로부터 수라(점심)을 대접받았고 도호부관아에 들러 활을 쏘고 연못에서 손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한 중 일 중 유일하게 임금의 행차를 볼수 있게 함.

양천부평시흥안산10지역을 지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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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산색은 지극히 곱고 선연한데

넓은 벌판 기름진 땅에 가을 곡식이 가득하다.

백성이 넉넉하고 정사가 평온하니 얼마나 좋은가

누가 감히 능히 강태공의 경륜을 다시 이을 것인가

-정조의 어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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