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가름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앎으로 나와서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음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
가믈코 또 가믈토다!
뭇 묘함이 모두
이 문에서 나오는도다.
‘영원불변의 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존재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불변이라고 부르는 것음 모두 변화의 다양한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부정하는 언어 개념 속에 밀폐된 관념적 불변의 도이다. 노자는 변화를 긍정하고 불변의 허구성을 부정한다.
노자는 가도 가도의 고정성 관념성, 연역성, 제약성을 버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도에로 희귀하려 한다. 상도는 영원히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화된 시간성’의 성격을 거부한다.
p38 그러나 서계의 <도덕경> 신주는 결코 노자의 본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과감한 사유의 전환을 과시하지는 못했다. 그는 율곡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개념의 틀 속에서 <도덕경>을 해석하려 했다.
P 초원의 <담노>은 조선왕조의 종원이며 체제의 종언이며 모든 권위주의의 종언이다. 서양에서는 칼막스가 나와서 사회지배계급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이론을 창안하였지만 이 사회주의적 혁명이론은 인류의 사유의 질서를 전복시키고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변혁시키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문명의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한 채 오직 문명의 소득에 대한 분배만을 운위 하였을 뿐이다. 노자는 비록 기원전 6세기경의 사상가 이긴 하나 그이 사상은 인류문명 전체와 씨름하고 있기에 문명의 발전도상에서 그 이기에 심취해 있는 인간들에게는
전혀 그 전체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늘 바램(욕심)이 없음으로써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욕심)이 있음으로써 그 교함(가상자리)을 본다.
노자가 도덕경이라는 경정을 쓴 이유는 분명 우리에게 유욕이나 유명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요. 무욕과 무명의 웅혼함과 그 웅혼함이 길러내는 그 인격 자세를 가르치려는 데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노자의 사유의 전방에 깔려있는 정조는 유에 대한 무의 가치론적 우위성이다. 유형보다는 무형이 유명보다는 무명이 유욕보다는 무욕이 모보다는 시가 교보다는 묘가 가치론적으로 우월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무가 무로써 진정하게 존립하기 위해서는 유를 같이 상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 잔여가 생멸 속에서만 진여일 수 있다는 일심의 논리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노자는 무명과 유명을 말했고 무욕와 유욕을 말했지 영과 육을 이원화시켜 말한 적이 없다. 최치원역시 현묘지도와 풍류를 말해도 영, 육의 대립을 이원화 하지 않았다.
노자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도 쉬운 말들일 뿐인데 그것이 쉽게 듣지 못하는 왜곡된 귀의 구조가 이미 이 사회의 들음의 정도인 양 정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수운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오(吾)도(道)는 박이약(博而約)이라 불용다언의(不用多言義) 하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매우 강렬한 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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